세상을 뒤흔든 질병과 치유의 역사 ⑪ (2019년 9/10월호)

미지의 방사선을 발견한 뢴트겐,
삶의 본질을 말하다

 

 

빌헬름 뢴트겐은 1845년 3월 27일 프로이센(현 독일) 헤센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직조 공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으로 부모는 사촌 간이었다. 늦둥이로 태어난 뢴트겐은 일가친척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뢴트겐이 3살 때 가족은 네덜란드로 이주해 시민권을 얻었다.
17살이 된 뢴트겐은 위트레흐트 주의 사립 공예학교에 입학한다. 공예학교는 기술계 단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고이다. 이론화학과 후닝 교수의 집에 하숙한 뢴트겐은 상냥한 교수 부인의 배려로 가족처럼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훗날 뢴트겐은 그 시절에 대해 ‘정말 행복했고 많은 것을 습득한 시기’로 공부뿐만 아니라 승마와 스케이트 등도 경험하며,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 깃든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때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런 공예학교 시절에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같은 반 학생이 장난삼아 그린 교사의 초상화가 문제가 되었다. 당사자인 교사는 “네가 한 짓이 아니냐”며 엉뚱하게 뢴트겐을 추궁하였다. 머리의 특징을 희화화한 초상화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교사는 뢴트겐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뢴트겐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초상화를 그린 친구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점점 격분한 교사는 뢴트겐을 초상화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 교무회의에 부치고 퇴학 처분을 내렸다.
회의에는 부모대신 후닝 교수가 참석해 “그런 사소한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내리다니 이해할 수 없다.”며 항의했지만, 뢴트겐의 이름은 학적부에서 말소되었다.


어쩔 수 없이 위트레흐트 대학에 청강생으로 다니던 뢴트겐에게 친구 트루먼이 공업전문대학은 고교졸업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진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그런데 또다시 불행히도 시험 직전에 플릭텐 각막결막염에 걸리게 되었다. 뢴트겐은 학장에게 편지와 함께 진단서를 제출하고 양해를 구한 끝에 간신히 입학 허락을 받아냈다. 이때가 뢴트겐의 나이 20살이었다.
이렇게 겨우 입학한 취리히의 공업전문대학은 기존의 대학과는 달리 기초 주요 과목에 집중하여 과학과 기술을 접목하는 실전적인 교육이 이뤄졌다. 이는 스위스 산업에서 시계 등의 정밀기계 분야에 필요한 기술자 양성이 요구되는 배경도 있었다. 이런 교육 방침이 오히려 물리학 실험에 종사하게 될 뢴트겐에겐 행운이었다.


이 전문대학은 나중에 취리히 공과대학으로 바뀌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같은 경위로 진학하였다.
게다가 취리히의 전문대학과 대학에는 전 유럽에서 우수한 학자가 초빙되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강의가이뤄졌다. 이곳에서 이론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은 뢴트겐은 우수한 성적으로 기계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연구 인생의 문이 활짝 열리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Adolf Eduard Eberhard Kundt 교수가 물리학 주임으로 부임하자 광학이론과 실험이론 강의가 개설되었다. 쿤트 교수와의 만남으로 뢴트겐에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쿤트 교수는 뢴트겐의 뛰어난 자질을 발견하고 조수로 채용하였다.
쿤트 교수의 조수로 직접 실험에 참여하게 되자 뢴트겐의 숨어 있던 천재적인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뢴트겐은 숱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실험에 몰두했다. 그리고 1869년「기체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심사원 만장일치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공예학교에서 추방된 그에게 이 심사 결과는 큰 기쁨이었다.


뢴트겐은 쿤트 교수와 진실된 사제 관계를 맺으며 본
격적인 연구생활에 돌입한다. 충분하지 않은 실험장비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거듭한 뢴트겐은 고명한 실험 물리학자 콜라우슈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명의 애송이 조교가 위대한 교수의 업적에 위축되지 않고 나름대로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것을 명확하고 간결한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 논문은 쿤트 교수의 추천으로 곧바로 권위 있는 과학 잡지에 발표되어 콜라우슈의 계산에 오차가 있음을 밝혀냈다. 과학의 진실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그다운 결과였다.


뢴트겐의 연구와 실험은 쿤트 교수 아래서 더욱 빛을 발하며 정밀한 실험 기법을 구사했다. 게다가 쿤트 교수는 뢴트겐의 대학 교원 자격 취득을 적극 지원하여 마침내 기센 대학 물리학 주임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주임 교수 뢴트겐은 조수에게 엄격하여 실험 중에 한눈을 파는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고, 자신의 실험과정을 철저히 답습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 밖의 논문까지도 닥치는 대로 섭렵하여 연구·실험의 범위를 넓혀 갔다. 흥미가 가는 논문은 추가 실험을 통해 결과를 관찰하고 깊이 연구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 기존의 연구와 연결하는 정교한 실험 방법과 강한 인내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나 재현 불가능한 실험은 저자에게 서신을 보내 가르침을 청하는 겸허함도 갖추었다.


강의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물리학 실험 기법은 매우 뛰어나 마술사와 같았다고 한다. 그의 지도 방침은 정확, 숙고, 진정한 결과 탐구, 지적인 성실, 넓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침에 입각해 자조·자립하는 강한 정신력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열정으로 마침내 뛰어난 과학자이며 훌륭한 교육자인 뢴트겐의 평판은 전 유럽에 알려졌다.
그리고 예전에 졸업 자격이 없어 청강생에 만족해야했던 위트레흐트 대학과 조수로 재직했던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교수 초청장을 받았다.


1888년 가을 뢴트겐은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교수로 취임한다. 연구 과정에서 가설이나 추론을 극단적으로 싫어한 뢴트겐은 공동 연구자나 조수에게 항상 실측치와 실증을 요구했다. 또한 연구 논문 작성에도 완벽함을 추구했다.
논문은 꼼꼼히 읽고 논지나 이론, 문장을 면밀하게
검사한 후, 잠시 시간을 두고 나서 다시 읽었다. 그후 논문 내용을 몇 시간에 걸쳐 토론하고 재차 정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동료 평가를 통해 정밀하게 낱말 수정을 거쳐야만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뢴트겐은 불필요한 단어나 문장은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자세를 바탕으로 뢴트겐은 물질의 비열 측정, 전류 식별, 유체 굴절률과 압력의 관계, 기체의 열용량, 편광에 미치는 전자기적 작용, 모세관 현상, 기름방울 확산, 방전관을 이용한 음극선의 특성 등 수많은 연구를 거듭하며 총 4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890년대는 전 세계에서 음극선 실험이 왕성하게 이뤄졌다. 방전관 전극에 전압을 걸어 방전관 내를 진공으로 만들면 음극에서 양극을 향해 형광을 발하는 방사선이 발생한다. 이것이 음극선으로 음극에서 튀어나온 전자이다. 이 전자가 다른 원자의 전자와 충돌하면 그 전자는 궤도 밖으로 튀어나가 에너지가 높은 상태가 된다. 이 전자가 본래의 궤도로 돌아올 때 방출하는 에너지가 형광이다.
뢴트겐은 이 진공 방전 현상에 관한 논문을 닥치는대로 섭렵하였으며, 콜라우슈나 하인리히 헤르츠 등의 연구 논문을 추가로 철저하게 실험했다. 진공 방전 현상에서는 헤르츠의 제자인 필리프 레나르트가 1894년 4월 진공도가 높은 방전관 레나르트관을 만들어 음극선에 관한 흥미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레나르트는 방전관의 음극선에 해당하는 부분의 유리에 얇은 알루미늄박을 붙여 작은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음극선을 2㎝ 정도 튀어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방전관 밖으로 끄집어낸 음극선을 레나르트선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이 레나르트선은
‘사진의 감광판을 감광시켜 알루미늄은 통과하지만, 석영 유리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성질을 발표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뢴트겐은 즉시 레나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뛰어난 방전관 제작 기술자를 소개했다. 게다가 두께 5μm의 귀중한 알루미늄박도 보내 주었다. 사실 뢴트겐은 음극선을 방전관 안쪽이 아닌 공기 중으로 꺼내 그것을 직접 조사하려고 했다. 음극선이 얇은 금속판을 통과한다면 얇은 유리관 벽도 통과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뢴트겐은 레나르트보다 대형 유도관 코일을 활용해 히토르프·크룩스관을 접속하고 관내에 고압 전류를 보냈다. 그때 관에서 90㎝ 정도 떨어진 곳에 둔 형광지가 빛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형광지가 왜 빛나는 거지?” 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한 뢴트겐은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았다. 전류를 통하면 코일의 파동성과 일치하는 색깔 있는 구름이 길게 끼는 것처럼 빛이 났다. 이 빛은 혹시 미지의 방사선이 아닐까? 뢴트겐은 레나르트의 실험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의 형광 물질을 빛나게 하는 미지의 물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전관과 형광지 사이에 다양한 물건을 두고 전류를 보낸 후 형광지가 어떻게 빛나는지에 관해 관찰하였다.


‘공기 속을 통과할 수 있고 길이가 길다는 것은 물체를 투과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책이나 얇은 알루미늄 판은 통과하였다. 하지만 얇은 연판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때 뢴트겐은 이것이 미지의 새로운 선이란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둥근 모양의 인쇄 연판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사이에 두었더니 예상대로 원형의 검은 그림자 속에 빛나는 원이 생겼다. 그 순간 뢴트겐의 뇌리에 전율과 같은 충격이 흘렀다. 연판을 든 손바닥뼈가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있는 게 아닌가.
이후 몇 주 동안 이 미지의 선을 집중적으로 실험하며 논문 작성에 몰두한 끝에 1895년 12월 28일, 마침내「새로운 방사선에 대하여」라는 불후의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확실한 증거로서 아내 베르타의 손가락 X선 사진을 첨부해 친구들과 물리 연구학자에게 보냈다.


X선 발견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며 곧장 골절이나 외상 등의 진단에 임상 응용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상대방의 몸을 투시한다는 X선 안경이나 그것을 방어하는 X선 방어 내의가 개발되거나, 종교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뢴트겐보다 먼저 X선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등장하자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게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기분”이라며 씁쓸해했다.
그 공로로 뢴트겐은 노벨상을 받게 되지만 상금을 모두 대학에 기부하였다. 학문상의 발견이 만들어낸 이익은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X선의 특허도 받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독일의 패전. 전후 식량난과 천문학적인 인플레 속에 병약한 아내와 뢴트겐은 생활고에 쪼들렸다. 병든 아내를 돌보며 청빈하게 살아온 뢴트겐은 1923년 2월 13일 78세로 사망했다.
“병든 사람을 위해 그가 성취한 업적은 위대하며 그 이름은 영원할 것.”이라는 조사와 함께 사람들은 애도했다. 오늘날 아마 뢴트겐 검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에게 위대한 과학 유산을 남기고 자신은 무일푼으로 청빈하게 살다 간 뢴트겐. 그의 연구 자세와 완벽을 추구하는 논문 작성의 태도, 그리고 검소한 생활조차도 현대 사회가 되돌아보아야 할 ‘삶의 본질’은 아닐까.

 

 

 

글 오카다 하루에(岡田晴惠)

옮긴이 황명섭

 

 

 

 

글쓴날 : [19-09-20 15:40] 스쿠바다이버기자[diver@scubamedia.co.kr]
스쿠바다이버 기자의 다른기사보기